확률과정을 다룰 때, 시간이 흐름에 따라 우리는 그 과정에 대한 정보(information)를 점점 더 얻게 된다. 어느 시점에서 결정을 내리거나 미래 사건을 예측해야 한다면, 우리는 그 시점까지 얻은 정보를 사용하고자 한다. 즉 그때까지 이용 가능한 정보로 조건을 건 조건부확률을 사용한다. 이것을 수학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이 바로 정보를 하나의 σ-대수(σ-algebra)로 나타내는 것이다.
σ-대수란 "예/아니오로 답할 수 있는 질문(사건)들의 집합"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답할 수 있는 질문이 늘어난다. 이렇게 시간에 따라 커지는 정보 모음을 차곡차곡 쌓아 놓은 것이 여과(filtration)다. 한 번 안 사실은 사라지지 않으므로, 정보 모음은 결코 줄어들지 않고 늘어나기만 한다.
표본공간 Ω 의 부분집합들의 모임 𝒢 가 다음을 만족하면 σ-대수라 한다: 공집합을 포함하고, 여집합에 대해 닫혀 있으며, 가산개 교집합(따라서 합집합)에 대해서도 닫혀 있다.
σ-대수들의 임의의 족 {𝒢α} 에 대해, 그 교집합 ∩α𝒢α 은 다시 σ-대수가 된다. 그러나 두 σ-대수의 합집합은 일반적으로 σ-대수가 아니다. 임의의 집합모임 ℋ 에 대해, ℋ 를 포함하는 모든 σ-대수의 교집합은 ℋ 를 포함하는 가장 작은 σ-대수가 되며, 이를 σ(ℋ) 로 표기한다. 거리공간 E 위에서 열린집합들이 생성하는 가장 작은 σ-대수를 보렐 σ-대수(Borel σ-algebra)라 한다.
우리는 완비 확률공간(complete probability space) (Ω, ℱ, P) 위에서 작업한다. 여기서 완비란 ℱ 가 모든 영집합(null set)을 포함함을 뜻한다. 확률과정 {Xt : t ∈ I} 은 확률변수들의 족이며, 이산시간이면 I = ℕ, 연속시간이면 I = ℝ+ = [0, ∞) 이다.
이제 ℱt ⊆ ℱ 이고 0 ≤ s ≤ t 일 때 ℱs ⊆ ℱt 를 만족하는(즉 정보가 비감소하는) σ-대수들의 족 {ℱt} 을 생각하자. 이를 여과(filtration)라 한다. 이것이 여과의 핵심인 단조 증가성이다.
기술적 편의를 위해 본 절의 나머지에서는 여과가 우연속(right continuous)이라고 가정한다. 즉 다음이 성립한다.
많은 책에서는 여과가 완비(complete)하다고, 즉 모든 ℱ-영집합이 ℱ0 에 포함된다고 추가 가정한다. 우연속성과 완비성을 함께 부과한 것을 흔히 통상의 조건(usual conditions)이라 부른다. 다만 여기서는 완비성을 가정하지 않는데, 측도변환(change of measure) 기법과 충돌하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측도변환 기법은 파산이론에서 매우 유용하게 쓰인다.
X = {Xt} 를 확률과정이라 하자. 각 t ∈ I 에 대해 Xt 가 ℱt 에 관해 가측이면, X 를 여과 {ℱt} 에 적응(adapted)되었다고 한다. 직관적으로 이는 "시점 t 까지의 정보만으로 Xt 의 값을 알 수 있다"는 뜻이다. X 를 적응시키는 가장 작은 우연속 여과를 X 의 자연 여과(natural filtration) ℱX 라 한다.
과정이 여과에 적응되었다는 것은, 현재 값을 정하는 데 미래의 정보를 쓰지 않는다는 뜻이다. 자연 여과는 그 과정 자신이 만들어 내는 최소한의 정보 흐름이다. 적응성은 마팅게일과 확률적분을 정의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전제다.
종종 우리는 어떤 무작위 시각(random time)에서의 확률과정에 관심을 갖는다. 그 무작위 시각이 표본경로의 성질로 정의될 때 다음 개념에 이른다. I 에 값을 갖는 확률변수 T 가 임의의 t ∈ I 에 대해 다음을 만족하면, T 를 ℱt-정지시각(stopping time)이라 한다.
즉 "T 가 t 이하인지 아닌지"를 시점 t 까지의 정보만으로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여과가 우연속이므로 이 조건은 {T < t} ∈ ℱt 와 동치다. 정지시각이라는 개념은 확률측도 P 가 아니라 오직 여과 {ℱt} 의 성질에만 의존한다. 따라서 어떤 정지시각과 거의 확실히 같은 확률변수라도 그 자체로는 정지시각이 아닐 수 있다. 또한 임의의 확정시각(deterministic time) t 는 정지시각이며, 두 정지시각 T, S 에 대해 T∧S 와 T∨S 도 정지시각이다.
정지시각의 대표적인 예는 최초도달시각(first entrance time)이다. X 를 ℝ 위의 적응 확률과정, u ∈ ℝ 라 하면 다음은 정지시각이다.
반면 정지시각이 아닌 무작위 시각도 있다. 예컨대 σ* = inf{t : Xt > 1} 같은 경우(엄격 부등호로 정의되어 비가산 시점을 봐야 하는 경우)나, τ(u)+1 처럼 미래의 진입 여부를 알아야 하는 경우는 정지시각이 아니다.
파산이론에서 잉여금 과정 Xt 가 처음으로 0 미만으로 떨어지는 시각 τ = inf{t : Xt < 0} 은 정지시각인가?
그렇다. 이는 최초도달시각의 형태이며, "시점 t 까지 잉여금이 한 번이라도 0 미만이 되었는가?"는 그 시점까지의 경로만으로 판정할 수 있어 {τ ≤ t} ∈ ℱt 가 성립한다. 미래 정보가 전혀 필요 없으므로 정지시각이다. 이런 까닭에 파산시각은 정지시각으로 잘 정의된다.
마지막 정의로, 정지시각 T 까지의 정보를 나타내는 σ-대수 ℱT 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그러면 ℱT 가 σ-대수임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또한 T ≤ S 이면 ℱT ⊆ ℱS 가 성립하고, XT 는 ℱT-가측이다. 이 모든 개념—여과, 적응성, 정지시각, 정지시각까지의 정보—은 마팅게일(martingale) 이론의 토대를 이루며, 옵션 정지정리·확률적분·측도변환 등 현대 확률론과 보험수리(특히 파산이론)의 핵심 도구로 쓰인다.
여과(filtration) 개념은 한국 계리 실무에서 칼만 필터·MCMC·확률과정 시뮬레이션과 결합된 형태로 등장한다. IFRS17 할인율 곡선의 시점별 갱신, 즉 매 결산 시점마다 시장 금리 정보로 조건을 건 최선추정할인율을 산출하는 과정은 정보 여과의 실무 사례다. 결산 기준일의 스왑 커브와 유동성 프리미엄 추정치가 F_t를 형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이후 현금흐름의 조건부 기댓값을 계산한다.
연금보험·변액보험의 보증급부 평가에서 마팅게일 측도 변환(측도 Q)을 사용할 때도 여과 개념이 기초가 된다. 내재가치(EV)·K-ICS 시장위험 산출에서 리스크 중립 시나리오 생성은 시간 t까지의 정보 σ-대수에 조건을 건 조건부 기댓값 계산이며, 이는 본문의 가용 정보 집합 개념과 정확히 대응한다. 일부 대형 생보사는 내부 확률론적 엔진에서 여과 인덱스를 명시적으로 설계해 경로 의존적 보증 평가에 활용한다.
재보험 계약에서 슬라이딩 스케일 커미션이나 손익 분담 구조(profit commission)도 시간 경과에 따른 누적 손해 정보를 여과로 이해할 수 있다. 손해 발생 시점까지 축적된 정보를 바탕으로 연말 정산액이 결정되는 구조이며, 이를 수식화할 때 정보집합 F_t가 핵심 개념으로 쓰인다.
IFRS17 계산에서 "시점 t의 정보로 조건을 건 미래 현금흐름의 기댓값"은 여과 E[X | F_t]의 직접 적용이다. 이를 코드로 구현할 때는 시점별 상태변수(금리, 사망률 추세, 해지율)를 인덱스 t와 함께 저장하여, 임의 시점의 조건부 평가를 재현할 수 있게 설계해야 한다. 감독원 검증 시에는 동일 기준일 조건에서 두 독립 시스템의 결과가 일치하는지가 모형 타당성의 기본 증거가 된다.